김정은 “싹 들어내라”…남북관계 파국·반전 중대 갈림길 - 한겨레
[뉴스분석] 김정은 “금강산 남쪽 시설 싹 쓸어내라” 지시
“남측과 협의” 단서 일방 철거는 않할듯…‘북-미 관계’엔 영향 안미쳐
남북관계 교착 국면 타계 염두에 둔듯…9월 평양공동선언 정면 배치
김연철 장관 “언제든 협의…정책전환인지 다른 시그널인지 더 분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관광지구를 현지 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관광지구를 찾아 “종합적인 국제관광문화지구 구상”을 밝히며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도록 하고 우리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23일 <노동신문>이 1면에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라고 단서를 달아, 일방적으로 철거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위원장의 이런 지시로 북쪽이 남쪽과 협의에 나서면, 그 결과에 따라 남북관계가 파국이냐 극적 반전이냐는 전혀 다른 행로에 접어들게 됐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 이후 악화일로인 남북관계가 결정적 고빗길에 들어섰다.
정부는 일단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을 통해 “우리 국민의 재산권 보호, 남북 합의 정신, 금강산관광 재개와 활성화 차원에서 언제든지 협의에 나설 계획”이라며 3가지 기준을 강조한 ‘통일부 입장’을 내놨다.
김 위원장은 금강산관광지구 안 해금강호텔·문화회관 등 시설을 돌아보고는 “민족성이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범벅식, 가설막·격리병동”처럼 “낙후·남루“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이라고 맹비난했다. 김 위원장이 현지지도 때 이렇게 강한 질타를 쏟아내는 건 드물지 않다.
하지만 금강산관광사업은 김 위원장의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사업”이다. 이미 고인인 김정일 위원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합의해 1998년 11월18일 시작된,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마중물이자, 남쪽 관광객 200만명이 찾은 남북 화해협력의 대표적 상징이다.
김 위원장의 “싹 들어내라”는 지시가 충격적이고 안팎으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김 위원장은 “금강산에 대한 관광사업을 남측을 내세워 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구체적으론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이라며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아버지이자 ‘무오류의 선대 수령’인 김정일 위원장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아버지의 ‘유훈사업’ 방식을 비판한 것이다.
2012년 집권 뒤 처음인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금강산 현지지도는 하노이 회담 이후 풀리지않는 북-미 협상 등 한반도 정세의 활로를 열려는 ‘먼저 움직이며 판 흔들기’의 성격이 강하다. 김 위원장이 백두산에 올라 “세상이 놀랄 웅대한 작전”을 구상했다는 <노동신문> 16일 보도 이후 첫 대외 신호 발신이다.
금강산관광 사업 자체는 유엔과 미국의 대북제재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남쪽 시설물 철거 지시는 미국·유엔 제재와 직접 관련이 없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합의 위반도 아니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과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기로 약속한 ’9월 평양공동선언’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신년사에서 “전제조건·대가 없는 금강산관광 재개 용의”을 강조했던 김 위원장이 “금강산이 10여년 방치돼 땅이 아깝다”며 내린 이번 지시엔, 북-미 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남북관계를 흔들어 장기교착 국면을 타개하려는 속내가 깔려 있을 수 있다. 실제 금강산 현지지도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장금철 통일전선부장, 대미협상을 총괄하는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이례적으로 동행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강산관광지구를 현지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3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넉달 가까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설주 여사와 걷고 있다. 연합뉴스
김 위원장이 금강산에서 발신한 신호는 안팎으로 복합적이다. 삼지연·원산갈마·양덕군온천지구 건설 등 3대 국책사업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예상 가능한 행보’이고, 남북 협력 측면에선 ‘변화’의 징후가 있다. 김 위원장이 “금강산 국제관광문화지구 구상”에 따라 ‘철거와 건설’을 지시하면서도 “남쪽 관련 부문과 합의하여”라고 단서를 단 게 그렇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이날 오전 더불어민주당과 정책 간담회에서 "진짜 정책 전환인지, 다른 시그널인지 좀 더 분석해봐야 한다"며 단정적 평가를 피한 까닭이다.
금강산관광사업은 현대아산이 남쪽 사업 주체로 50년 독점사업권을 확보하고 있다. 북쪽은 사업 장기 중단 원인이 된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사건에 따른 갈등 와중에 남쪽 자산 ‘몰수·동결’(2010년 4월)과 ‘현대 독점사업권 취소’(2011년 4월) 조처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물론 정부와 현대아산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앞으로 남북 협의 과정에서 남쪽이 건설·운영하던 남쪽 시설의 권리 주체 문제로 남북 갈등이 빚어질 위험이 상당하다. 현대아산은 “관광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보도에 당혹스럽지만 차분히 대응해나가겠다”는 한 문장짜리 반응만 내놓고 입을 닫았다.
김 위원장은 “금강산과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마식령스키장이 하나로 연결된 문화관광지구로 잘 꾸려야 한다”며 “금강산관광지구총개발계획을 먼저 작성·심의하고 3~4단계로 갈라 년차·단계별로 건설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어 관광비행장·관광전용열차노선·항구여객역 건설 등도 지시했다. 제재 해제 이후 국외 관광객 유치를 염두에 둔 ‘금강산~원산갈마~마식령’을 잇는 야심찬 구상이자, 2002년 지정한 ‘원산~금강산 관광특구’ 계획의 구체화다. 전직 고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도 언급한 우리의 ‘합의 권한’을 활용해 우리의 대안을 담은 역제안으로 오히려 기회의 창으로 삼아야 한다”며 “새로운 금강산관광사업을 북쪽과 마련·실행하려면 어떻게든 미국을 설득해낼 계획과 결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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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07:23:43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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