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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은 죄가 없다 '안 읽는 내 죄'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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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밀레니얼 읽기
(1) 번아웃, 구독인간

구독서비스 제공자 겸 열혈이용자
편리함 크지만 통장이 ‘텅장’ 되네

매일 메일 여는 것도 일 ‘피로인간’
기묘한 편리함 위에 오늘도 ‘구독’

자신의 취향에 맞춤한 브랜드의 정기 구독 회원이 되고, 추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교한 구독 서비스에 깊이 빠져든 사람들. 구독서비스 제공자인 천다민씨도 다양한 구독을 하는 ‘구독인간’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춤한 브랜드의 정기 구독 회원이 되고, 추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정교한 구독 서비스에 깊이 빠져든 사람들. 구독서비스 제공자인 천다민씨도 다양한 구독을 하는 ‘구독인간’이다.
새벽 5시, 띠링 하고 알림이 온다. ‘뉴닉 레터’가 메일함에 도착하는 소리다. 나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떠 메일을 열어본다. 오타는 없는지, 전하려던 메시지는 잘 담겼는지 확인한다. 수십번을 훑어봐도 기어코 나오고 마는 오타는 다른 활자의 두세배 크기로 눈에 박힌다. 내가 쓴 레터이지만 마치 처음 보는 기분으로 읽고 나면, 사람들이 보낸 피드백을 체크한다. 뉴닉이 정리해 준 콘텐츠가 유익했다는 칭찬부터,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레터마다 1000명에서 5000명 가까운 ‘뉴니커’들이 응답한다. 그 이야기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어느덧 아침 뉴스를 확인할 시간이 된다. 매일 아침 내가 보고 정리한 소식이 일주일에 세번, 25만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레터로 가닿는다는 사실은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다. ‘뉴닉 에디터’라는 직업에 만족하는 이유이자, 매번 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게 되는 까닭이다.
구독 서비스 제공자이기 이전에 열혈 이용자인 나, 피로함에 찌든 오늘도 구독 버튼을 누른다.
구독 서비스 제공자이기 이전에 열혈 이용자인 나, 피로함에 찌든 오늘도 구독 버튼을 누른다.
즐겁고 알찬 만큼 대가 따른다 바야흐로 구독의 시대다. 2018년 12월, ‘우리가 시간이 없지, 세상이 안 궁금하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태어난 뉴닉(NEWNEEK)은 창립 2년 만에 구독자 22만명을 넘겼다. 지금은 이슬아 작가가 하는 것과 같은 글 구독 서비스부터, 시사 콘텐츠를 제공하는 뉴닉 같은 서비스, 시인이나 작가가 직접 쓰는 뉴스레터가 넘쳐난다. 쇼핑도, 세탁도, 점심도, 와인도 구독할 수 있다. 생활부터 취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구독의 대상이다. 쿠팡 같은 배송 서비스도 구독 모델을 기본으로 한다. 멤버십 서비스에 가입하면 혜택이 더해지고, 그것으로 식사와 생활필수품을 더 싸게 챙길 수 있다. 눈뜨면 유행하는 옷이 도착하고, 먹을 점심이 배송되고, 들을 음악과 볼 영화가 제공된다. 구독과 함께라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즐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구독은 분명 삶에 윤택함을 더한다. 모든 걸 바꾸어주지는 않아도, 삶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애플 뮤직의 좋은 음악들은 거리를 클럽으로 종종 바꿔주고, 세탁 구독 서비스는 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도 뽀송뽀송한 셔츠를 아침마다 입게 해 준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통장이 ‘텅장’이 된다는 점이다. 0이 몇개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잔고가 허전하다. 정기결제 목록을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못 쓴 데이트 신청 카톡만큼이나 구구절절하다. 유튜브 프리미엄 구글 플레이 8900원, 넷플릭스 1만4500원, 왓챠플레이 7900원…. 보고 듣는 일에 어찌나 후한지, 목록이 끝도 없다. 여기다 읽을 만한 칼럼들을 제공하는 리디셀렉트와 네이버 웹툰을 읽기 위한 쿠키 충전까지 셈하면 거의 한달 10만원 가까운 돈을 ‘구독’에만 밀어넣고 있는 셈이다. 아니, 한 항목을 빼먹었다. 월세. 그러고 보니 가장 크게 지불하고 있는 구독료는 살고 있는 집에 대한 구독료다. 한달에만 몇십만원 돈이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다. 몸을 누일 몇평짜리 방에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유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라고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에서 말했었던가. 사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구독이 아니라 소유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유하지 못하는 나는 끊임없이 구독한다.
필자인 천다민씨의 받은메일함엔 갖가지 이유로 구독하게 된 레터들이 잔뜩이다.
필자인 천다민씨의 받은메일함엔 갖가지 이유로 구독하게 된 레터들이 잔뜩이다.
메일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정신 차려!’ 하며 뺨을 친다. 안 읽는다는, 못 읽는다는 죄책감이 함께 일렁인다. 붉은색 숫자들이 띠링거리며 존재감을 뽐낸다. 안 읽은 메일 수가 100개가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부동산도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 뉴스도 좀 봐야 하지 않을까? 주식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로 읽는 건 좀 그래, 이제 외국 뉴스레터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영어 공부에 도움도 될 것 같은데…. 수십가지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구독하게 된 레터들이 잔뜩이다. 어피티, 부딩, 뉴욕 타임스, 시엔엔, 모닝 브루가 저마다 이모티콘을 귀엽게 달고 좀 열어달라 아우성이다. 꾸준히 열어 본 메일은 안타깝게도 내가 발행에 참여하는 뉴닉 뉴스레터뿐. 휴지통에 넣기엔 어쩐지 읽지 않은 죄책감과 빵빵해 보이는 정보 때문에 아쉽고, 휴지통에 안 넣고 그대로 두자니 서운하다. 구독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구독 인간은 갈피를 못 잡고 헤맨다. 펴 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내 구독의 역사는 애초부터 ‘미룸’과 ‘휴지통’과 맞닿아 있었다. 구몬 학습지를 타의로 구독하던 시절, 방석 아래부터 아파트 아래 풀숲과 화단, 책꽂이 뒤편까지 학습지를 한장씩 찢어 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제 나이를 한참 더 먹어 구독한 것들을 풀숲에 숨겨두기는 머쓱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그때와 비슷하게 아직 읽지 않은 이야기들이 잔뜩 밀린 채 휴지통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뉴닉 이미지
뉴닉 이미지
구독하며 자괴감 생기는 이유 누구에게 물어도 다들 비슷한 죄책감을 토로한다. “영어 공부하려고 외신 레터 잔뜩 구독해놨는데 볼 때마다 죄책감 들어. 해지하기는 좀 그렇고.” “미안하다. 요즘 뉴닉도 다 못 읽는다.” “이제 좀 지쳐. 레터 읽다가 번아웃 올 것 같아.” “구독하는 게 너무 많아서 뭘 하고 있는지도 다 모르겠어. 왓챠나 넷플릭스도 안 본 지 오래 됐어.” “너무 피곤해.” 다들 쫓긴다. 피곤해? 물으면 물어 뭐 하냐는 표정들이다. 나를 비롯한 내 또래들은 다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고 있다. 분명 자신이 선택한 일인데도 조종실에 앉아 있기보다는 기차 끝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시작한 일을 멈추지 못한다. 러닝머신 위에서 누군가가 대신 속도를 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급하다. 손을 뻗어 붉은색 정지 버튼을 누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이 직장에서 ‘존버’ 중이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듯, 우리는 잘 맞지 않는 속도에 적응하려 애쓰며 각자의 위치에서 ‘존버’한다. 입사하자마자 퇴사를 꿈꾸고, 넉넉한 자본을 꿈꾸며 주식시장 주변을 기웃거리지만 실제로는 갑자기 닥쳐오는 번아웃을 이기고 매일 출근하는 것도 버겁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안주연씨는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에서 한국 사회를 ‘피로하다고 말하는 데에도 자격을 요구’하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휴식이나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사회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만 피로하면서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향해 자신을 밀어붙이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종류의 불안까지 케어하는 ‘마음건강 구독 서비스’도 여럿 나와 있다.
필자인 뉴닉 에디터 천다민씨는 구독 서비스 제공자이기 이전에 열혈 이용자다.
필자인 뉴닉 에디터 천다민씨는 구독 서비스 제공자이기 이전에 열혈 이용자다.
뭐든 구독할 수 있고, 뭐든 가능해진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된다. 무료로 주어지는 레터가 있음에도 부동산을, 주식을, 영어를 공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공평하게 정보들이 주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2010년에 사회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를 통해 내린 진단은 강산이 한번 변한 2020년에도 줄곧 유효하다. 오늘도 열리지 않은 뉴스레터들은 그대로고, 어쩐지 목구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피로감의 맛은 약간 쓰다. 하지만 구독 서비스엔 죄가 없다. 세상을 알아보기에 피곤한 내게 온갖 유용한 정보를 다정하게 떠먹여주는 레터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주는 세탁 서비스 없이 어떻게 회사에 갈 수 있을까. 이 복잡한 다정함, 기묘한 편리함 위에서 오늘도 나는 새로운 ‘구독’ 버튼을 누른다. 글·사진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을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하며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고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테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December 06, 2020 at 07:0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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