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내 책을 말한다] 얼굴을 그리다 - 조선일보

blogpolitikgue.blogspot.com
입력 2020.06.20 05:03

정중원 화가
정중원 화가

할머니께 초상화를 그려 드린 적이 있다. 할머니는 웃으며 고맙다고 하셨고, 그림은 할머니 장례 때 영정으로 사용되었다. 친척들이 진실을 말해 준 건 그다음이었다. 할머니께서 그림을 장롱에 넣어 두고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으셨다고 했다. 초상화를 바라보는 걸 몹시 힘들어하셨다는 것이다. 그림이 당신의 노쇠한 모습을 너무 있는 그대로 묘사한 탓이었다. 이때 깨달았다. 초상화가는 자신의 시선과 더불어, 당사자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모습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슷한 일화는 역사 속에서도 빈번하다. 당사자가 그림을 끔찍이 싫어한 탓에 그레이엄 서덜랜드가 그린 윈스턴 처칠의 팔순 기념 초상화는 통째로 소각되고 말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는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가 "너무 진실되다"며 그림을 세간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진실'을 과감히 포착한 덕에 훗날 명작 반열에 오른다.

초상은 사회의 일면을 나타내기도 한다. 천안문 광장에 군림하는 마오쩌둥의 초대형 초상화는 무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새로 제작된다. 런던 한복판에 서 있던 처칠 동상엔 최근 가림막이 설치됐다. 그가 했던 인종차별 발언과 식민지에서 펼친 반인권적 정책을 문제 삼으며, 시위대가 동상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상은 개인을 기록하는 동시에 사회의 양상을 함축하는 상징이 다. 누구나 카메라를 휴대하는 21세기에 붓으로 얼굴을 그리는 초상화가로서, 나는 초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인과 사회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 미학자나 미술사가가 아닌, 직접 그림을 그리는 예술 노동자의 관점에서 말이다. 이 책 '얼굴을 그리다'(민음사)가 건네는 이야기가 초상을, 더 나아가 '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제시할 수 있기 바란다.




June 20, 2020 at 03:03AM
https://ift.tt/2V0kuMh

[내 책을 말한다] 얼굴을 그리다 - 조선일보

https://ift.tt/2YuBHi8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내 책을 말한다] 얼굴을 그리다 - 조선일보"

Post a Comment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