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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말한다] 혼밥 판사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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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8.08 05:03

정재민 작가·전 판사
정재민 작가·전 판사
지금은 방위사업청에서 군함을 만들지만 4년 전까지 나는 판사로 일했다. 직업을 바꾼 것은 판사직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인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 유럽 여행을 가는데 처음 간 프랑스가 좋다고 이탈리아나 체코를 가보지 않는 것은 손해 아닌가. 새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신 뱀처럼 대지를 뒹굴고도 싶었다. 외교부·국방부·유엔재판소에서 진즉 다른 세계를 맛본 영향도 있다. 범죄와 이혼 판결문 대신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좀 더 쓰고 싶었다.

재판 이야기에 음식 이야기를 곁들여 보았다. 먹기도 즐기고 글쓰기도 즐기는데 '먹기에 대한 글쓰기'는 오죽 즐거울까, 하는 해맑은 생각이 앞섰다. "자기소개 대신 차라리 굴튀김에 대해서 써보라, 그러면 자동으로 자기소개가 된다"고 했던 하루키의 말도 영향을 끼쳤다.

'미술관 옆 동물원'처럼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음식과 법의 세계를 병치해 보고 싶었다. 누구도 탄수화물과 단백질 성분이 몇 퍼센트인지, 레시피가 무엇인지로 음식 맛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법의 세계에서는 인간을 법 개념으로 분해해 놓고 너무 쉽게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 '혼밥 판사'(창비)는 내 반성문이기도 하다.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처음 상처는 당사자들끼리 주고받지만 마지막 상처는 판사의 판결이 준다. 당사자에 비할 바 아니지만 판사도 상처를 받는다. 재판 날 저녁에는 누굴 만날 기분이 아니어서 혼밥을 했다. 돼지갈비, 칼국수, 홍어애탕, 두부, 라면, 짜장면을 혼자 먹고 있으면 웅크려진 가슴이 펴지곤 했다. 이윽고,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삼켰던 말을 옆자리에 환상으로 소환한 당사자에게 속으로 털어놓곤 했다. 이 책은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니었던 그 한 끼, 한 끼의 기록이다. 이제, 그 밥상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August 08, 2020 at 03:0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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